루 해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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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 해리슨(Lou Harrison, 1917-2003)은 미국의 작곡가로, 세계 각지의 민속 음악을 참조하여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12음 기법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음률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자바 가믈란을 비롯한 다양한 악기를 조율하여 작곡했다. 그는 에스페란토 지지자이자 동성애 인권 운동가로, 정치적, 사회적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03년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20세기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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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이지는 우연성 음악과 4분 33초 등으로 유명하며 비서양 음악과 실험적인 연주 기법을 수용하여 음악의 경계를 넓힌 미국의 작곡가, 음악 이론가, 철학자, 작가 및 예술가이다.
루 해리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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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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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루 실버 해리슨 |
직업 | 작곡가 음악 평론가 음악 이론가 화가 |
배우자 | 윌리엄 콜비그 (1967–2000) 토드 벌링게임 (2001–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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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출생일 | 1917년 5월 14일 |
출생지 | 미국오리건주포틀랜드 |
사망 | |
사망일 | 2003년 2월 2일 |
사망지 | 미국인디애나주라피엣 |
음악 경력 | |
장르 | 현대 음악 |
2. 생애
루 해리슨은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베이 에어리어 주변으로 이사했다. 1934년 캘리포니아주 벌링게임에서 벌링게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22]
월드 뮤직에 가까운 성격의 작곡 활동을 했으며, 12음 기법으로 작곡한 첼로와 하프를 위한 모음곡도 있지만 이후 이 기법에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태평양의 론도'에서는 피날레에 12음 기법을 배치하여 이 기법이 세계의 조화를 깨는 것으로 묘사했다. 존 케이지와 공동 작곡을 할 정도로 친했지만, 성격 차이로 결국 결별했다.
음률에 대한 열정이 컸던 그는 자바 가믈란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 악기도 조율하여 작곡하는 등 폭넓은 예술적 기량을 선보였다. 무대 위의 업라이트 피아노를 직접 조율하여 청중에게 여러 다른 조율의 음계를 들려주기도 했다.
현대 음악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싫어했고, 키스 자렛과의 활동처럼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는 연주가들과의 협업을 선호했다. 에스페란토로 된 성악 작품도 많이 남겼으며, 특히 반야심경의 에스페란토 번역에 곡을 붙인 "La Koro Sutro"가 유명하다.[20][21]
2003년, 자신의 음악을 기념하는 페스티벌에 가던 중 인디애나주래피엣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 (1917-1934)
해리슨은 1917년 5월 14일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서 클래런스 "팝" 해리슨과 전 알래스카 거주자였던 캘린 릴리안 "칼" 해리슨(옛 성은 실버)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의 가족은 이전 상속으로 인해 처음에는 재정적으로 넉넉했지만, 대공황 직전에 어려움을 겪었다. 해리슨은 부모님과 남동생 빌과 함께 9년 동안 포틀랜드 지역에서 살다가 캘리포니아 북부의 여러 지역(새크라멘토, 스톡턴, 샌프란시스코)으로 이사했다.[1][2]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아시아계 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였고, 해리슨은 종종 동아시아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집을 일본 등롱, 화려한 오리엔탈 양탄자, 고대 중국 유물 복제품으로 장식했다.[1][2] 그는 그곳에서 광둥 오페라, 하와이 키카킬라, 재즈, 노르테뇨, 클래식 음악 등 다양한 음악을 접했고, 이에 깊이 매료되었다.[3] 그는 성인이 되었을 때 유럽 음악보다 중국 전통 음악을 훨씬 더 많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해리슨은 어릴 때부터 음악에 대한 관심을 보였고, 부모님은 이를 지지했다. 칼은 가끔 피아노 레슨을 받게 해 주었고, 팝은 어린 해리슨을 차에 태워 잠시 동안 미션 샌프란시스코 데 아시스에서 전통적인 그레고리오 성가를 공부하게 했다. 그러나 가족이 일자리를 찾아 자주 이사 다니면서, 청소년기의 해리슨은 장기간의 우정을 쌓을 기회를 거의 얻지 못했다. 종종 이방인 같은 느낌을 받으며 그는 자신의 미적 판단에 의존하여 결정을 내렸고, 서구의 예술적 스타일에서 점점 더 멀어졌다. 대신 그는 독학을 더욱 발전시키는 데 몰두했고, 종종 지역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동물학에서 유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책을 읽었다. 그는 하루에 두 권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으며, 이러한 광범위한 관심사는 그의 삶 전체, 특히 그의 미래 작곡에서 이질적인 영향들을 연결하도록 이끌었다. 외로웠던 어린 시절은 그가 도시와 "도시 생활"을 매우 싫어하게 된 원인으로 여겨진다.
해리슨은 벌링게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동성 친구에게 매력을 느끼고 자신이 게이임을 알게 되었다. 1934년 12월 17세의 나이로 졸업할 무렵, 그는 가족에게 커밍아웃했고, 그 이후 자신의 성적 지향과 개성을 숨기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는 당시 게이 남성에게는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1][4]
2. 2. 음악 교육과 초기 활동 (1934-1943)

1934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해리슨은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현재 샌프란시스코 주립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확장 과정에서 제공하는 헨리 카웰의 "세계의 민족 음악" 강좌를 수강했다. 해리슨은 카웰의 가장 열정적인 학생 중 한 명이 되었고, 카웰은 그를 수업 조교로 임명했다.[5] 1935년 6월, 팔로알토에서 카웰의 피아노와 즉흥 타악기 작품 공연을 본 후, 해리슨은 그 작품을 자신이 들어본 가장 특별한 작품 중 하나라고 평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음악에 발견된 타악기와 우연성 연주의 요소를 도입했다. 같은 해 가을, 해리슨은 카웰에게 개인 작곡 수업을 요청했고, 이는 1965년 카웰이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이어진 개인적이고 전문적인 우정의 시작이었다. 카웰이 설립한 뉴 뮤직 에디션을 통해 해리슨의 음악이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카웰이 동성애 행위와 관련된 혐의로 샌 퀜틴 교도소에 4년 동안 수감되었을 때, 해리슨은 그의 석방을 공개적으로 호소했고, 교도소의 철창을 통해 정기적으로 그를 방문하여 작곡 수업을 받았다.
19세에 대학에 재학하면서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오클랜드의 밀스 칼리지에서 임시 교수로 재직했다. 1941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UCLA)로 옮겨 무용 학과에서 일하며 학생들에게 라반 동작 분석을 가르치고 피아노 반주를 했다. 그곳에서 아놀드 쇤베르크에게 이론 수업을 받았고, 이로 인해 12음 기법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6][7] 그는 "... 12음악을 쓰는 것을 배우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에게 가르쳐 준 사람은 헨리였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가 썼던 작품들은 버려진 드럼 브레이크, 쓰레기통과 같은 비전통적인 재료를 악기로 사용하는 타악기 작품이 많았다.[8] 초기작 중 하나인 《그랜드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1937)을 포함한 그의 생존 작품 중 몇 안 되는 작품이 총렬주의 12음 기법을 따른다.[1] 그는 카웰처럼 피아노 작품에 음군을 사용했지만, 옥타브 길이의 평평한 나무 막대인 "옥타브 바"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달랐다. 이를 통해 음군은 더 크게 연주될 수 있었고, 피아노는 징과 같은 소리를 냈다. 그의 실험적인 스타일은 이 시기에 번성하여 《바이올린과 타악기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1940) 및 《미궁》(1941)과 같은 작품이 나왔다.[9] 이 초현대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음악은 카웰의 또 다른 학생인 존 케이지의 관심을 끌었다. 해리슨과 케이지는 그 후 몇 년 동안 협력했고, 여러 차례의 로맨틱한 관계를 가졌다.[6]
2. 3. 뉴욕 시절과 정신적 위기 (1943-1949)
1943년, 버질 톰슨의 부탁으로 뉴욕 시로 이주하여 헤럴드 트리뷴의 음악 평론가로 일했다.[7] 그곳에서 칼 러글스, 앨런 호바네스, 찰스 아이브스 등 여러 작곡가들과 교류했다. 해리슨은 특히 아이브스의 작품을 알리는 데 헌신했다. 그의 멘토 코웰의 도움을 받아 아이브스의 교향곡 3번 (1910)의 초연을 각색하고 지휘했으며,[7] 아이브스는 그 대가로 해리슨에게 재정적 도움을 주었다. 아이브스가 그 곡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을 때, 그는 상금의 절반을 해리슨에게 주었다.창작 활동은 풍성했지만, 해리슨은 뉴욕에서 외로움과 불안에 시달렸다. 로스앤젤레스의 무용가와의 관계는 이사 때문에 끝나야 했는데, 그는 이미 서부 해안을 그리워하며 이사를 후회하기 시작했다. 1945년까지 그는 여러 개의 궤양을 앓았고, 신경 상태가 악화되면서 치료가 불가능해 보였다. 새로운 음악을 완성하려 했지만, 그의 작품과 대중적 이미지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내면화하면서 극심한 자신감 부족으로 인해 많은 곡들이 찢겨지고 검게 칠해졌다.
1947년 5월, 향수병, 과도한 업무, 동성애 혐오적인 동료들로부터 오는 극심한 스트레스는 심각한 신경 쇠약으로 이어졌다.[1] 존 케이지는 해리슨을 돕고 그를 오시닝의 정신과 클리닉으로 데려갔다. 해리슨은 몇 주 동안 클리닉에 머물다가 뉴욕 장로교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회복을 위해 9개월간의 광범위한 치료와 몇 년 동안의 정기 검진을 받았다. 많은 동료들은 이 쇠약이 그의 경력의 종말을 알릴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해리슨은 심리적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작곡을 계속했다. 병원에 머무는 동안 그는 교향곡 G (1952)의 많은 부분을 포함하여 여러 작품을 작곡했고, 정기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는 가능한 한 빨리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1948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해리슨은 병원에서 "저는 단순하고 잘 살고 싶지만, 여기서는 그게 불가능합니다."라고 썼다.[4]
2. 4. 캘리포니아에서의 새로운 삶 (1949-2003)
루 해리슨은 뉴욕 시절의 위기를 겪으면서 작곡 스타일을 크게 바꾸었다. 이전의 불협화음 대신 온음계와 5음 음계를 사용한 서정적인 선율을 추구했는데, 이는 당시 유행하던 학문적인 스타일과 크게 달랐다. 1949년 퇴원 후 2년 동안은 그의 경력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만든 시기 중 하나로, 인상주의 음악풍의 첼로와 하프를 위한 모음곡, ''The Perilous Chapel and Solstice'' 등을 작곡했다.[21]1930년대에 인도네시아 음악을 연구하고 발리 음악과 자바 음악 요소를 작품에 여러가지로 통합한 친구 콜린 맥피의 영향을 받아, 해리슨의 스타일은 가믈란 음악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시작했다. 그는 가믈란의 소리에 매료되어, 자신의 작품에 가믈란 악기 음색을 탐구하고 모방하였다.
1950년대 초, 해리슨은 해리 파치의 저서 ''음악의 창세기''(1949)를 읽고 순정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평균율을 버리고 순정률로 음악을 쓰기 시작했으며, 단순한 비율을 사용하여 음악을 만들고자 했다.
해리슨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그리고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밀스 칼리지를 비롯하여 샌호세 주립 대학교, 캐브릴로 칼리지, 리드 칼리지, 블랙 마운틴 칼리지 등 여러 대학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1953년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애프토스에 정착했고, 조슈아 트리에 짚단 집을 짓고 실험적인 악기 제작을 계속했다.

1961년 일본과 한국, 1962년 대만을 방문하여 아시아 음악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특히 대만에서는 고쟁 명인 량차이핑에게 배웠다. 해리슨은 윌리엄 콜비그와 함께 '미국식 가믈란'을 창안하고, 이를 위한 작품을 다수 작곡했다. 그는 알루미늄 키와 튜브, 산소 탱크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가믈란과 유사한 음색을 가진 악기를 만들었다. 그는 이러한 악기와 합창단을 위해 "라 코로 수트로"(에스페란토어로)를 썼으며, 바이올린과 미국식 가믈란을 위한 모음곡도 작곡했다. 또한 고쟁을 연주하고 작곡했으며, 1960년대에 콜비그 등과 함께 300회 이상의 중국 전통 음악 콘서트를 개최했다.[11]
1960년대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의 샌호세 주립 대학교에서 상주 작곡가로 활동했다. 1969년에는 그의 음악을 기리는 콘서트가 열렸는데,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 초연되기도 했다.
그는 월드 뮤직에 가까운 작곡 활동을 했으며, 12음 기법으로 작곡한 첼로와 하프를 위한 모음곡도 있지만, 이후 이 기법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태평양의 론도'에서는 피날레에 12음 기법을 배치하여 이 기법이 세계의 조화를 깨는 것처럼 묘사했다. 존 케이지와 공동 작곡을 할 정도로 친했지만, 성격 차이로 결국 결별했다.
해리슨은 음률에 대한 열정이 컸다. 세계의 다양한 음률에 정통했던 그는 자바 가믈란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 악기도 조율하여 작곡하는 등, 폭넓은 예술적 기량을 선보였다.
그는 현대 음악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싫어했고, 키스 자렛과의 활동처럼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는 연주가들과의 협업을 선호했다.
에스페란토로 된 성악 작품도 많이 남겼으며, 특히 반야심경의 에스페란토 번역에 곡을 붙인 "La Koro Sutro"가 유명하다.[20][21]
2003년, 해리슨은 자신의 음악을 기념하는 페스티벌에 가던 중 인디애나주래피엣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2. 5. 죽음
2003년 인디애나주래피엣의 한 데니스 레스토랑에서 심장 마비로 쓰러져 사망했다.[20][21]3. 주요 작품
루 해리슨은 다양한 장르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다.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서곡과 사라반데 (Präludium und Sarabande)
- 알렐루야 (Alleluja)
- 새로운 송가 (Neue Ode) - 독창, 합창, 낭독 합창, 관현악, 타악기 및 동양 악기를 위한 곡
- 태평양을 따라 북소리가 (Drums Along the Pacific)
- "라 코로 수트라 (La Koro Sutro)"
- Rhymes With Silver
- 세레나데 (Serenado)
- 솔로 키보드 (Solo Keyboards)
- 퍼시피카 론도 (Pacifica Rondo)
- 카를로스 차베스를 위한 비가 (Threnody for Carlos Chávez) (1978), 비올라와 가믈란을 위한 곡[13]
- 교향곡 4번 (1990, 1995년 개정) - 브루클린 필하모닉 초연, 아메리카 원주민 음악, 고대 음악, 아시아 음악을 결합한 작품.[12]
1990년 브루클린 필하모닉이 초연한 교향곡 4번은 "마지막 교향곡"으로 불리며, 나바호족의 "코요테 이야기" 연작을 포함한다. 1995년 개정판은 아르고 레코드에서 녹음되었다.[12]
3. 1. 실내악/앙상블 작품
- 아리아드네 (1987), 플루트와 타악기[12]
- 찰스 아이브스의 무덤에서 (1963), 실내 관현악단[12]
- 플루트 협주곡 (1939)[12]
- 타악 합주단과 함께하는 오르간 협주곡 (1951), 타악 앙상블, 오르간 및 앙상블[12]
- 피아노와 자바 가믈란을 위한 협주곡 (1986–87)[12]
- 현악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피파 협주곡 (1997), 아시아 악기 및 앙상블[12]
- 바이올린과 타악기를 위한 협주곡 (1959)[12]
- 슬렌드로 협주곡 (1961)[12]
- 바이올린, 첼로, 자바 가믈란을 위한 협주곡 (1981–82)[12]
- 현을 위한 새로운 첫 번째 모음곡 (1995), 현악 오케스트라[12]
- 퍼시피카 론도 (1963), 실내 관현악단[12]
- 기타를 위한 세레나도 (1952), 기타 독주[12]
- 벌새의 아름다움을 위한 찬사 (1951), 혼합 5중주[12]
- 은빛 운율 (1996), 첼로와 앙상블, 혼합 5중주[12]
- 기타와 타악기를 위한 세레나데 (1978), 혼합 2중주, 기타 독주[12]
- 7개의 목가 (1949년 8월 - 1951년 10월), 실내 관현악단[12]
- 솔스티스 (1949), 8중주 (플루트, 오보에, 트럼펫, 첼로 2대, 더블 베이스, 첼레스타, 택 피아노)[12]
- 숲의 노래 (1951), 혼합 4중주[12]
- 현악 4중주 모음곡 (1978)[12]
- 첼로와 하프를 위한 모음곡 (1949)[12]
- 타악기를 위한 모음곡 (타악기 연주자 5명을 위한, 1942)[12]
- 미국 가믈란과 바이올린을 위한 모음곡 (1973)[12]
- 현악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린을 위한 모음곡 (1997)[12]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1995)[12]
- 첼로와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 (1984, 1990)[12]
- 위험한 예배당 (1948), 혼합 4중주[12]
- 다양한 트리오 (1986), 라이스 볼, 바이올린, 비브라폰, 피아노 (아벨-스타인버그-위넌트 트리오를 위해 작곡)[12]
- 현악 4중주 '쇤베르기아나' (1944)[12]
- 서곡과 사라반데[13]
- 알렐루야[13]
- 태평양을 따라 북소리가[13]
- "라 코로 수트라"[13]
- 은빛 운율[13]
- 세레나데[13]
- 퍼시피카 론도[13]
- 카를로스 차베스를 위한 비가 (1978), 비올라와 가믈란[13]
3. 2. 관현악 작품
- 교향곡 1번 사장조(No. 1) (1947)
- 교향곡 2번 '비가'(1942)
- Suite from Marriage at the Eiffel Tower (1961) (산타크루즈 심포니를 위한 작품)
- 바이올린과 여러 지역(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악기를 위한 음악 (1967)
- 교향곡 3번(1982) (카브릴로 음악 축제를 위한 작품)
- 피아노 협주곡(1983–85) (키른베르거 #2(웰 템퍼먼트의 한 형태)로 조율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
- 교향곡 4번(1990, rev. 1995)
: 1990년 11월 2일, 브루클린 필하모닉은 해리슨의 네 번째 교향곡을 초연했는데, 그는 이 곡의 제목을 "마지막 교향곡"이라고 지었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 음악, 고대 음악, 아시아 음악을 결합하여 풍성한 관현악 작곡으로 묶었다. 특별히 포함된 것은 나바호족의 "코요테 이야기" 연작이었다. 그는 1995년에 최종 버전을 완성하기 전에 교향곡에 여러 차례 수정을 가했고, 이 버전은 1997년 3월 스카이워커 랜치(캘리포니아주 니카시오)에서 배리 제코스키와 캘리포니아 심포니에 의해 아르고 레코드에서 녹음되었다. 이 CD에는 해리슨의 ''엘레지, 캘빈 시몬스의 기억을 기리며''(1982년 보트 사고로 익사한 오클랜드 심포니의 전 지휘자에게 바치는 헌사), ''하지'', ''슬렌드로 협주곡'', ''더블 뮤직''(존 케이지와의 협업)의 발췌곡도 포함되었다.[12]
- 서곡과 사라반데 (Präludium und Sarabande)
- 알렐루야 (Alleluja)
- 새로운 송가 (Neue Ode) - 독창, 합창, 낭독 합창, 관현악, 타악기 및 동양 악기를 위한
- 태평양을 따라 북소리가 (Drums Along the Pacific)
- "라 코로 수트라 (La Koro Sutro)"
- Rhymes With Silver
- 세레나데 (Serenado)
- 솔로 키보드 (Solo Keyboards)
- 퍼시피카 론도 (Pacifica Rondo)
- 카를로스 차베스를 위한 비가 (Threnody for Carlos Chávez) (1978), 비올라와 가믈란을 위한
3. 3. 합창/가곡 작품
- Alma Redemptoris Mater영어 (1949–51), 저음 성부와 앙상블을 위한 곡[1]
- La Koro Sutro영어(1970), 혼성 합창과 가믈란, 혼성 합창과 앙상블을 위한 곡[1]
- 성 안토니 미사(1939), 혼성 합창과 앙상블을 위한 곡[1]
- 오르페우스 (1969), 독주자, 혼성 합창, 앙상블을 위한 곡[1]
- 엄숙한 노래(1955), 바리톤 독주, 합창, 실내 관현악단을 위한 곡[1]
- 세 개의 노래(1985), 남성 합창과 앙상블을 위한 곡[1]
- Vestiunt Silve영어 (1951), 소프라노와 4개의 악기를 위한 곡[1]
3. 4. 건반악기 작품
- 피아노 모음곡 (1943)
- 쳄발로(피아노)를 위한 6개의 소나타 (1943)
- 물레
- 서머 필드 (1988)
- Waltz for Evelyn Hinrichsen, piano solo
- 서곡과 사라반데 (Präludium und Sarabande)
- 알렐루야 (Alleluja)
- 새로운 송가 (Neue Ode) - 독창, 합창, 낭독 합창, 관현악, 타악기 및 동양 악기를 위한
- 태평양을 따라 북소리가 (Drums Along the Pacific)
- "라 코로 수트라 (La Koro Sutro)"
- Rhymes With Silver
- 세레나데 (Serenado)
- 솔로 키보드 (Solo Keyboards)
- 퍼시피카 론도 (Pacifica Rondo)
- 카를로스 차베스를 위한 비가 (Threnody for Carlos Chávez) (1978), 비올라와 가믈란을 위한
3. 5. 오페라
- 라푼젤 (1952)
- 젊은 카이사르 (1970)
4. 음악적 특징
루 해리슨의 음악은 20세기 서양 음악의 주류였던 12음 기법과는 대조적으로, 멜로디 중심적이고 리듬을 강조하며, 화성은 단순하거나 때로는 완전히 배제하는 경향이 있었다.[15] 그는 동양과 서양의 음악 형식을 융합한 선구적인 작곡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15]
해리슨은 순정률을 사용하여 음악을 작곡했으며, 음악을 "감성적인 수학"으로 간주했다.[16] 그는 "음악가들이 문학적인 만큼 숫자에도 능숙한 시대를 오랫동안 꿈꿔왔다. 지휘자가 되어 '자, 첼로, 거기서 10:9를 줬는데, 대신 9:8을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16]
자바 가믈란 음악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미국식 가믈란'을 창안하고, 이를 위한 작품을 다수 작곡했다. 콜린 맥피의 영향을 받아, 해리슨의 스타일은 음색에서 가믈란 음악의 영향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매료시킨 것은 소리 그 자체였다. 뉴욕에서 12음 기법에서 벗어나 기어를 바꿨을 때, 나는 이 음색을 탐구했다."라고 회고했다.[17]
자주 사용되는 기법은 "간격 제어"인데, 이는 오름차순 또는 내림차순의 소수의 멜로디 간격만 사용하고 반전을 사용하지 않는 기법이다.[16] 예를 들어, 교향곡 4번의 시작 부분에서 허용되는 간격은 단3도, 단6도, 장2도이다.[16]
해리슨은 해리 파치가 신체성이라고 부르는 것, 즉 라이브, 인간, 연주 및 즉흥 연주, 음색, 리듬을 포함한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에 대한 강조를 중시했다. 마크 모리스는 해리슨의 기타를 위한 세레나데를 "새로운 종류의 춤의 기반"으로 사용했다고 언급했다.[17]
해리슨은 쓰레기나 파운드 오브젝트(found object)로 간주되는 것들로 악기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14] 태크 피아노라는 준비된 피아노의 일종을 사용하기도 했다.
5. 사회적 활동과 신념
루 해리슨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거침없이 표현했으며, 평화주의자이자 국제어 에스페란토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다.[6]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혔으며, 동성애 역사에 대한 지식도 갖춘 정치적으로 활동적이고 정보에 정통한 인물이었다.[6]
그는 정치적인 텍스트나 제목을 가진 작품을 많이 썼는데, 예를 들어 ''Homage to Pacifica''는 퍼시피카 재단의 버클리 본부 개관을 위해 작곡되었다.[6] 또한 포틀랜드 게이 남성 합창단과 시애틀 남성 합창단의 의뢰를 받아 ''Strict Songs''를 편곡하기도 했다.[6] 로렌스 매스는 해리슨에 대해 "동성애는 긍정적인 것이다. 그는 자신이 게이 작곡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관심이 있다."라고 묘사했다.[6]
재니스 기텍은 해리슨을 "창의성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대담하게 양성적"이라며, "여성적 측면과 남성적 측면에 모두 중요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6]
해리슨은 에스페란토로 된 성악 작품도 많이 남겼는데, 특히 반야심경의 에스페란토 번역을 사용한 아메리칸 가믈란과 합창을 위한 "La Koro Sutro"가 유명하다.[20][21]
6. 저술
Lou Harrison's World Music Primer영어』, 柿沼敏江일본어, 藤枝守일본어 역, 제스크 음악 문화 진흥회, 1993.7, ISBN 978-4-6365-503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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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liner notes for Argo CD 455 5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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